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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독후감] 생존을 위한 끝없는 노동의 구덩이 (모래의 여자)

by 어썸오184 2021.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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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의 대표작. 1962년에 출간되어 그에게 일약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으로 1964년 영어로 번역된 데 이어 프랑스어, 체코어, 핀란드어, 덴마크어, 러시아어 등 이미 20여 개 언어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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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위한 끝없는 노동의 구덩이

2019.12.01  

“십몇 년 전, 저 폐허의 시절에는 모두들 한결같이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찾아 광분하였다. 그렇다고 지금,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에 식상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실제로 너 역시 그런 환상을 상대로 한 귀신놀이에 지친 나머지 이런 사구를 찾아오지 않았던가……. 모래…… 1/8mm의 한없는 유동……. 그것은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에 매달려 있는 네거 필름 속의 뒤집힌 자화상이다. 아무리 소풍을 동경하는 어린애라도 미아가 된 순간에는 엉엉 우는 법이다.” (p. 88)

  한 남자가 휴가를 받고 곤충 채집을 하러 벽지의 사구(砂丘)로 떠난다. 남자의 목표는 모래땅에서 사는 신종 곤충을 발견하는 것이다. 생명체가 발붙일 수 없도록 끊임없이 유동하는 모래 위에서 살아남은 곤충이라면 그에 걸맞은 강한 적응력을 가지고 있을 터, 강한 적응력은 곧 많은 변종이 있음을 뜻한다. 그는 새로운 곤충을 찾아 곤충 도감에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러나 남자는 도리어 이곳에서 영원히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해가 기울 때까지 별 소득을 얻지 못한 남자에게 주변 촌락의 노인이 다가온다. 노인은 남자에게 마을에서 하룻밤 묵고 갈 것을 제안한다. 남자는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소개받은 집이 조금 이상하다. 10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모래 구덩이 아래 집 한 채가 놓여 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 집 안 천장에서는 끊임없이 모래가 흘러내린다. 30대로 보이는 여성이 그를 맞이한다. 쉼 없이 모래가 흘러내리고 씻을 물조차 넉넉지 않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는다. 어차피 내일이면 이 집을 떠날 테니까.

  밤이 되자 여자가 밖으로 나가 모래를 석유통에 퍼 담기 시작한다. 흘러내리는 모래를 치우지 않으면 집이 모래에 파묻히고 만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구덩이 밖에서 여자가 퍼 담은 모래를 끌어 올린다. 쉴 틈 없이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여자도 쉴 틈 없이 삽질을 한다. 사방림(砂防林)을 만드는 것보다 이렇게 매일 모래를 퍼내는 것이 더 싸게 먹힌다는 여자의 말에, 남자는 그녀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마을 사람과 이런 부당함에 저항하지 않는 그녀에게 알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아침이 되자 남자는 크게 당황한다. 구덩이를 빠져나갈 사다리가 사라진 것이다. 남자는 꼼짝없이 구덩이에 갇혀 모래를 파내지 않으면 안 될 위기에 처한다. 그리고 이렇게 납치를 당한 것이 자신이 처음이 아니란 것도 알게 된다. 외부인을 구덩이에 가두고 그들이 퍼올린 모래를 공사현장에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이 마을의 생존방식이었다. 마음대로 사람을 가두고 노동을 착취하다니,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상식을 벗어난 일이다. 번듯하게 호적도 갖고 있고 직업도 있으며 세금도 꼬박꼬박 내는 데다 의료보험증까지 갖고 있는 한 인간을 마치 새앙쥐나 곤충처럼, 덫을 놓아 잡는다는 것이 과연 허용될 수 있는 일인가. 믿을 수 없다. 틀림없이 무슨 오해다, 오해가 있는 것이다. 오해라고밖에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다.” (p. 54)

  남자는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한다. 처음에는 모래벽을 기어올라 구덩이 밖으로 나가려 했으나 번번이 흘러내리는 모래에 휩쓸려 굴러 떨어진다. 다음 수는 납치극과 파업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물 보급 중단으로 대응한다. 대화와 협상을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살기 위해서는 삽을 드는 수밖에 없다. 남자는 예상과 달리 빠르게 노동에 적응하는 스스로를 보며 놀란다.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생각했던 것만큼의 저항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변화의 원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 배급이 중단될까 봐 두려워서인가, 아니면 여자에 대한 자책감 때문인가, 아니면 또 노동 자체의 성격 때문일까? 과연 노동에는, 목적지 없이도 여전히 도망쳐 가는 시간을 견디게 하는, 인간의 기댈 언덕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p. 153)

  구덩이에 갇혀 산지도 몇 달이 흘렀다. 여자는 모래를 퍼담는 노동이 끝나고 구슬을 꿰는 부업을 한다. 그 돈으로 라디오와 거울을 사는 것이 그녀의 작은 소망이다. 남자 또한 여자와 육체적 쾌락을 즐기기도 하고 가끔씩 들어오는 신문과 잡지를 보며 구덩이 속 생활에 적응해간다. 그러나 아직 탈출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까마귀를 잡아 구조 신호를 보낼 요량으로 덫을 만들었다. 식량으로 보급 받은 정어리를 미끼로 한 이 덫의 이름은 ‘희망’이다. 그러나 몇 주가 지나도 까마귀가 잡힐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희망’에서 나는 썩은 생선 냄새가 코를 찌른다. 미끼를 가는 김에 덫을 점검하는데 놀랍게도 바닥에 물이 차 있는 것을 발견한다. 모래의 모관 현상 때문에 바닥의 수분이 빨려 올라온 것이다. 이걸 잘 활용하면 식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충분한 물을 생산할 방법을 찾아내기 전까진 마을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기로 한다.

  “여전히 구멍 속에 있음에는 변함이 없는데, 마치 높은 탑 위에 올라 있는 듯한 기분이다. 세계가 뒤집혀, 돌기와 웅덩이가 반대로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모래 속에서 물을 파낸 것이다. (…중략…) 놈들이 얼마나 야단법석을 떨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끓어오른다. 구멍 속에 있으면서, 이미 구멍 밖에 있는 것이다.” (p. 223)

  몇 달이 지나 임신한 여자가 갑자기 격통을 호소한다. 마을 사람들이 구덩이로 내려와 여자를 데리고 나간다. 급한 나머지 사다리를 치우지 않은 채 병원으로 떠났다. 남자는 사다리를 타고 구덩이 밖으로 나온다. 허무한 탈출이다. 기대했던 만큼 공기가 신선하지는 않다. 남자는 구덩이를 바라본다. 그가 개발 중인 유수 장치가 보인다. 나무틀 한 쪽이 비틀어져 있어 이를 고치러 다시 내려간다. 물은 계산상 예정되어 있는 양만큼 차 있다. 어쩌면 이 마을의 삭막한 모래를 비옥한 토양으로 바꿀 발명품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성과를 가장 잘 알아줄 사람은 이 부락의 사람들이다.

  “딱히 서둘러 도망칠 필요는 없다. 지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왕복표는 목적지도 돌아갈 곳도, 본인이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는 공백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유수 장치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으로 터질 듯하다. 털어놓는다면, 이 부락 사람들만큼 좋은 청중은 없다. 오늘이 아니면, 아마 내일, 남자는 누군가를 붙들고 털어놓고 있을 것이다.

도주 수단은, 그 다음날 생각해도 무방하다.” (p. 227)

  그렇게 고대했던 탈출이었건만, 남자는 너무나도 쉽게 탈출을 포기한다. 책에서 남자가 탈출을 할지 말지 고민하는 장면은 반 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다. 소설의 나머지 부분에 나타나는 남자의 긴 독백과 심리묘사와 대비된다. 이렇게 중요한 고민에 반 페이지도 할애하지 않다니! 남자에게는 더 이상 일상에서의 삶과 구덩이 속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이 짧은 고민으로 강조되는 듯하다. 남자에게 중요한 것은 이쪽 세계냐 저쪽 세계냐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사람으로부터의 인정 욕구이다.

  어떤 이들은 남자의 이런 어처구니없는 선택을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현재 일상이 모래 구덩이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깨달은 사람들이라면 남자의 선택에 대해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할 것 같다. 작년 겨울방학에 청주의 한 건설현장에서 인부로 두 달간 일을 했었다. 건설현장 주변의 원룸촌에 마련된 방에서 팀원 3명과 함께 숙식하며 일했다. 매일 아침 5시가 되면 어제의 노동에 지친 몸을 이끌고 정신없이 현장으로 향한다. 오후 5시에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같은 팀 아저씨들이 다 씻을 때까지 기다린 후 마지막으로 씻고 나오면 저녁 7시 반 정도가 된다. 맥주 한 캔을 마시고 폰을 만지작거리다 보면 어느새 밤 9시, 지금 자지 않으면 내일 아침이 힘들다. 보일러 온도를 최대치로 올린 방바닥에 이불을 깔고 눈을 감으면 아침 알람이 울린다. 분명 방금 눈을 감은 것 같은데 8시간이나 지났다.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째 되던 날 문득 통장에 입금된 월급을 보며 오롯이 다음 학기 생활비로 치환되는 지금 이 시간들이 서글퍼졌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있나?

 

“인간은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이다.” -장 폴 사르트르

 

  이번 겨울 방학에도 청주로 내려갈 예정이다. 지금은 다행히 등록금을 내 주시는 부모님 덕에 방학동안만 일을 하면 되지만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면 내 남은 인생 절반의 시간은 전부 생존과 소비를 위한 돈으로 치환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모래의 여자처럼, 만족하는 듯 살아가지만 실은 하루 종일 구덩이에서 모래를 파내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산다. 가끔씩 얻게 되는 라디오와 거울을 잠시 위안삼아 바라볼 뿐이다. 우리는 노동 자체가 가진 신성성에 대해 배우고 자랐지만, 책을 덮으며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노동은 정말 신성한가? 인간이 광합성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부조리한 일이다. 매일 입에 무언가를 집어넣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생존과 노동은 불가분의 관계가 된다. 평생 쓰고도 남을 유산을 물려받은 자가 아니라면 모두 살기위해 노동해야 한다. 모래의 여자의 삶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삶이다. 우리 모두 살기 위해 매일 매일 모래를 퍼 담는다. 모래 구덩이로 표현되는 인간의 삶은 노동과 생존의 필연적 관계를 드러낸다. 그래서 노동은 신성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생의 절반 혹은 대부분의 시간이 그저 모래를 퍼내는 무의미한 시간에 불과하다면 억울해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노동에 자아실현이니 성취감이니 하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모두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저 자기 자신을 사기에 걸려든 어리숙한 인간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탓에 열심히 회색 캔버스에다 환상의 제전을 흉내내는 것이다.” (p. 95)

  우리 모두 각자의 구덩이에서 오로지 살기 위해 모래를 퍼내고 있는 중이다. 책을 덮으며 왠지 모르게 서글퍼진다. 산다는 것이 생존과 번식 이외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구덩이 안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는 있을까, 탈출한다면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구덩이를 탈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남자는 왜 다시 구덩이 속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을까? 모래 구덩이를 탈출해서 돌아갈 일상 또한 사실 모양만 달리한 다른 구덩이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은 아닐까?

“어차피 인생이란 거 일일이 납득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만, 저 생활과 이 생활이 있는데. 저쪽이 조금 낫게 보이기도 하고…… 이대로 살아간다면, 그래서 어쩔 거냐는 생각이 가장 견딜 수 없어…… 어떤 생활이든 해답이야 없을 게 뻔하지만…… 뭐 조금이라도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이 많은 쪽이 왠지 좋을 듯한 기분이 들거든……” (p. 199)

  ‘저 생활’은 그저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이 조금 더 많을 뿐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남자는 ‘이 생활’이 가지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인정’이 ‘저 생활’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마음을 잘 달래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구덩이로 다시 들어간 것이다. ‘저 생활’로 돌아가기 위한 탈출은 진정한 의미의 탈출이 아니었다. 구덩이 밖의 삶은 남자가 첫 번째 탈출에서 보았던 풍경과 비슷할 것이다. 시끄럽게 짖어대는 개들과 밟는 순간 끊임없이 밑으로 빠지는 모래 늪이 도사리고 있는 곳. 물과 식량을 공급해줄 사람도 없이 끊임없이 걸어야하는 곳. 구덩이 밖의 삶이 구덩이 속 삶보다 편하지 않음은 확실해 보인다. 구속은 늘 자유보다 편하고 아늑하다.

 이 소설의 서사가 남자의 시선과 생각을 따라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제목이 <모래의 여자>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남자는 끊임없이 탈출을 구상하지만(그것의 목적이 다른 구덩이를 향하고 있다 할지라도) 여자는 탈출을 원하지 않는다. 모래를 파내는 와중에 부업을 하고 그 돈으로 라디오와 거울만 살 수 있으면 족하다. 굳이 구덩이 밖으로 나갈 이유가 없다. 노동과 생존, 생산과 소비의 굴레를 벗어난 삶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은가.

이 틀을 벗어난 다른 형태의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에 앞서 그러한 삶을 상상할 필요가 있을까? 유엔미래보고서는 2045년이 되면 지금의 일자리 80%를 인공지능이 대체할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 빌 게이츠는 로봇세를 거두어 복지 예산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적지 않은 나라들이 AI의 일자리 대체에 대한 해법으로 기본소득을 고려하고 있다. 조금 더 먼 미래에는 노동이 종말할지도 모를 일이다. 인류를 평생 동안 구속해왔던 노동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아무리 소풍을 동경하는 어린애라도 미아가 된 순간에는 엉엉 우는 법이다.” 노동과 생존, 생산과 소비의 틀을 벗어난 인간의 삶의 의미를 계속 찾아야 할 이유 중 하나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언젠가는 구덩이 밖으로 나와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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