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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독후감] 그저 사랑하는 것 (해리)

by 어썸오184 2021.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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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1,2 세트

이 상품은 YES24에서 구성한 상품입니다.(낱개 반품 불가).[도서] 해리 1 |  저 | 해냄[도서] 해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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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4

“나는 앞으로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책을 읽을 때 계속 머릿속을 맴돌던 질문이었다. 이 소설은 인터넷 신문기자 한이나가 이해리와 백진우 신부의 악행을 추적하면서 만나게 되는 인간들의 추악한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이다. 거짓말 중에서도 특히 우리가 쉽게 선하다고 믿는 사람들, 이를테면 사제(司祭), 장애인 봉사자, 진보적 정치인 같은 사람들의 거짓말과 위선에 대해 집중한다. 공지영 작가가 처음에 이 소설의 제목을 ‘거짓말’로 하려 했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이나는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말 그대로 소설이 끝나기 직전까지도) 끊임없이 거짓말에 속고 상처와 충격을 받는다. 심지어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쉴 새 없이 거짓말을 해대는 그들에게 일종의 경이로움까지 느낀다.

작가는 전작 『도가니』의 배경인 ‘무진’을 다시 한번 불러들였다. 『도가니』가 거대 악과 싸우는 과정과 결과를 다루었다면, 『해리』는 악한들의 거짓말과 위선에 대한 탐구에 조금 더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어떤 한 두 사람의 비리의 실체를 폭로하거나 악을 처단하는 통쾌한 결말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여러 인간 군상의 추악한 내면을 서술하면서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든다.

 

선의를 악용하려는 사람들

우리는 흔히 약자는 선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지영 작가는 이 소설을 ‘어떤 악녀에 관한 보고서’라고 표현했다. 그 점에 비추어 볼 때, 이해리를 악녀로 규정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다고 본다. 하지만 그 악녀는 굉장히 열악한 환경에서 학대받고 자란 약자이다. 선악 구도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주인공의 성장 배경이나 사회적 지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설정되어 있다. 악인인 이해리는 주정뱅이 홀아버지 밑에서 가난하게 자란 사회적 약자이다. 유명한 화가와 예술대 학장 밑에서 자란 한이나는 악한들을 추적한다.

작가는 우리가 흔히 쉽게 선입견들을 계속해서 비튼다. 세계적인 사교 모임의 총재와 장애인 센터를 운영하는 미혼모 사이의 성추행 공방에서 대중들은 모두 약하고 선한 것으로 보이는 이해리의 말을 믿지만 한이나는 계속해서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자신에게 묻는다. 진실 공방이 이해리의 승리로 끝나자 한이나는 의아하게도 ‘온몸에서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을 받는다. 사회적 약자가 권력자에게 성추행을 당했고 그가 처벌받는, 겉으로 보기에는 정의롭고 온당한 결과이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다. 채수연은 이해리에게 직장과 남편을 빼앗긴 스트레스로 인해 팔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장애를 갖게 되었다. 한이나는 채수연의 진술을 믿고 사건을 파헤치다가 채수연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음을 알게 된다. 피해자인 줄로만 알았던 채수연 또한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거짓말을 일삼는 인간이었다.

소수자와 약자의 권리 보호에 목소리를 높였던 공 작가가 이런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이 소위 ‘언더도그마’를 지적하려는 의도는 아니라고 본다. 작가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듯 나도 진실은 보통 약자에게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점을 악용하려는 사람들 역시 존재한다. 오히려 사회가 발전할수록 그 숫자는 더 늘어난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시민의식이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은 시민들의 연대와 약자에 대한 배려이다. 성숙한 시민들이 많아질수록 이런 배려를 악용하려는 사람들도 늘어난다. 현대를 바라보는 공지영 작가 또한 이러한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말과 인격의 해리(解離)

소설은 해리성 인격 장애에 대한 짧은 설명과 함께 시작된다. 당연히 우리는 ‘해리’라는 이름이 단순한 고유 명사로 쓰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해리와 백진우는 가면을 쓴 채 위선을 떨며 돈과 권력을 얻는다. 그들이 미디어에 비치는 모습과 이들의 추악한 내면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그들은 SNS를 통해 너무도 쉽게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사람들을 기만한다.

얼마 전 SBS 김성준 앵커가 불법 촬영 혐의로 체포되었다. 평소 그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 대해 강하게 규탄하는 발언들을 해왔다는 점과 공영방송의 신뢰받는 언론인이라는 점 때문에 대중들의 충격과 배신감은 더욱 컸다. 동물권 보호 단체 ‘케어’의 박소연 대표 또한 여러 방송 출연과 개인 SNS를 통해 자신을 거짓으로 꾸미고 이를 통해 수백억 원의 후원금을 모았다. 하지만 올해 초 ‘케어’의 내부고발자를 통해 그동안 그녀가 거짓말로 사람들을 기만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TV 속 그녀의 모습과 실제 모습은 상당히, 불행히도 좋지 않은 쪽으로, 달랐다. 한 때, 학대받는 개들을 구하기 위해 헌신하는 박소연 대표를 보면서 ‘그래도 아직 저런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었던 나로서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소설 속의 인물들을 보다 보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근거로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빠진다. 끝에 가서는 결국 한이나처럼 인간에 대한 희망마저 잃게 된다. 사람을 판단할 때는 겉으로 보이는 말과 행동을 근거로 할 수밖에 없다. 백진우로 이해리가 후원금을 긁어모을 수 있었던 것도 페이스북과 미디어에 비치는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가능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 이외에 그 사람의 본모습을 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과연 존재하는가. 그래서 이런 탈을 쓴 위선자들은 명백한 악인보다 훨씬 더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사회적 이미지와 기대라는 것은 얼마나 허망한가.

 

그저 사랑하는 것

소설 속에서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인뿐만이 아니다. 채수연, 정성일, 남우, 그리고 민들레 마을 신부까지, 모두가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한다. 오 화백이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나서 한 말처럼, 인간은 자기 자신조차 쉽게 속이는 나약한 존재이다. 끝없는 거짓말과 위선에 지친 이나는 마지막에 미카엘 신부에게 묻는다. 아무 희망도 느끼지 못하는 이 세상에서 결혼을 하고 가족을 만들고 아이를 낳는 게 가능한지. 미카엘 신부는 그녀에게 단호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우리 모두가 그냥 자주 잘못에 빠지는 인간임을, 인간은 긍휼의 대상일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말한다.

글을 읽다 머리를 한 대 쌔게 치는 듯한 구절이 있었다. 미카엘 신부가 동료 신부들에게 폭행을 당해 눈을 다쳤을 때, 그들에게 분노하는 한이나에게 최 신부는 “자매님, 화내지 마세요. 그들은 독약을 먹고 있어요. 그게 독약인 줄도 모르고, 안 죽네, 맛있네, 이러고 있다고요. 그들이 쥐약이 든 빵을 계속 먹고 있는데, 왜 화가 나요? 안타깝지요.”라고 말한다. 폭행을 당해 한쪽 눈을 잃을 위기에 처한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분노가 아니라 안타까움이라니.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안타까움. 미워하지 않고 안쓰럽게 여기는 것, 그저 사랑하는 것. 악한들이 미워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빼앗은 가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싸워야 한다는 그 말. 그것이 과연 나에게도 가능한 일일까?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인간을 안타까이 여길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아직은 성숙하지 못해서, 나에게는 안타까움보다는 분노가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진다. 지금부터라도 하나님의 가르침을 배워야 할지, 고민이다.

 

한 가지 의문

나는 공지영 작가를 좋아하고 그녀의 선의를 믿으며 그녀의 실력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목에 걸린 가시처럼 거슬리던 부분이 한 가지 있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소설을 쓸 때는 그만큼의 책임과 주의가 필요하고 그에 대한 부담도 따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실화를 다루겠다고 말한다면, 이를 반드시 다루어야 할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책의 도입부에 “만일 당신이 이 소설을 읽으며 누군가를 떠올린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사정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소설이 실화를 바탕으로 쓰였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작가는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이 소설은 허구”라고 말하며 현실과 소설의 경계선을 긋지만, 정작 소설 내에서 ‘나꼼수’, ‘정봉주’, ‘박근혜’, ‘이명박’, ‘세월호’ 등을 언급하며 스스로 그 경계를 허문다. 소설의 모티브가 된 두 가지 사건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구 희망원 사건과 달리 소위 ‘봉침 스캔들’이라 불리는 사건은 아직 진실이 소상히 밝혀지지 않은 채 의혹 단계에 머물러 있다. 작가는 왜 굳이 이런 사건을 모티브로 글을 썼을까. 설사 이를 모티브로 하더라도 이 소설이 어떤 비리의 실체를 폭로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면, 앞서 말했듯이, 굳이 ‘제 딸이 나꼼수에 나오는 정봉주 의원 팬이라서’ 같은 설정을 끼워 넣을 필요가 있었을까. 이해리와 봉침 목사를 애써 분리하려 노력해야 하는 것 역시 전적으로 내 사정인 것일까. 그런 불편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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